여러 나라에서 대개 OK의 뜻으로 사용되고, 우리 나라에서는 한때 김영삼 대통령의 선거의 상징처럼 쓰였던 손가락 표시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손가락 세 개를 펴는)를 브라질에서 했다가는 칼을 맞을 수도 있다. 매우 극심한 손가락 욕이기 때문이다. 손가락 표현은 나라마다 대륙마다 매우 다양하다. 전 세계 공용처럼 쓰이는 승리의 V도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야지 손등을 내밀면서 V자를 그렸다가는 매우 심각한 분위기와 마주할 수도 있게 된다. 그건 상대방에 대한 모욕 행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손등을 내밀면서 그리는 V가 상대방에 대한 조롱으로 쓰인 유래는 1415년 10월 25일 오늘 일어난 중대한 사건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이 사건이란 잉글랜드 왕 헨리 5세가 프랑스 군을 크게 무찌른 아쟁쿠르 전투다.
1415년 8월 프랑스에 상륙한 헨리 5세의 잉글랜드 군은 잔뜩 지치고 병들어 있었다. 성 하나를 뺏기 위해 공방전을 벌였지만 전투보다는 이질 등의 질병으로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 "월동 장비를 구하기 위해" 또는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위해 헨리 5세의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 북부의 칼레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행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창투성이의 땅 아쟁쿠르에서 그만 절치부심 영국군을 전멸시키리라 맹세하던 프랑스 기사군에 따라잡히고 말았다. 양측의 병력 추산은 연구에 따라 다르지만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병력 수가 많았고, 뭣보다 영국군들이 갑옷은커녕 가죽 누더기를 걸치고 길다란 활을 둘러멘 보병들이 주종을 이룬 반면, 프랑스 군은 당시의 최고급 장인들이 만들어 냈으며, 눈이 부셔 쳐다보기에도 휘황한 갑옷을 차려 입은 기사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귀족들이었다. 몇 시간 뒤 그 전장에서 죽어나간 프랑스의 귀족만 해도 공작이 3명, 백작이 5명, 남작이 90명이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아장거리는 영국군 보병들을 한껏 조소하며 저들을 쓸어버리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의 부친과 할아버지 가운데에는 100년 전쟁 와중에 영국군에게 참혹한 패배를 당해 전사한 이들이 많았다. 그 복수심까지 겹쳐져서 프랑스 귀족 기사군의 전의는 비정상적으로 불타올랐다.
영국군 진중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새벽에 프랑스의 사자가 와서 항복을 권했지만 왕 헨리 5세는 단호하게 그를 물리쳤다. 이제는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영국군은 그들의 앞에 뾰족한 말뚝을 박아 방호벽을 쳤고 프랑스군의 돌격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들에게는 비장의 무기 하나가 있었다. 일찍이 웨일스 지방에서 쓰였으며 웨일스 토벌 작전 와중에서 잉글랜드가 얻은 비장의 무기 장궁이었다. 누더기 가죽 옷을 걸친 궁수들은 대개 웨일스인이거나 하층 농민들, 심지어 감옥에서 참전을 댓가로 풀려나온 죄수들도 있었다. 저 앞에 진을 친 프랑스 귀족 기사단의 위용에 비하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도 못되는 그들 앞에서 헨리는 그 심금을 울리는 연설을 한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으로 더욱 극적으로 윤색된 그의 연설 중 일부는 이렇다.
"몇 안되는 우리, 그러나 소수이기에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나와 함께 피 흘리는 자는 모두 내 형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한 자라도 오늘 그의 지위가 고결해지리라. 그리고 지금 침대에 편안히 누워 있을 영국의 귀족들은 이 자리에 있지 못했던 것을 한탄하리라. 그리고 성 크리스핀의 날 (10월 25일) 우리와 함께 싸웠던 이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인격이 부끄러워진다고 느끼리라..... 이 이야기를 선량한 사내들은 그의 아들에게 전하리라; 그리고 크리스핀 데이는 오늘부터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들을 기억하지 않고는 그냥 흘러가지 않으리라."
아쟁쿠르의 영국군은 1분에 15발의 화살을 퍼부을 수 있었지만 서울의 평민 부대는 단 한 번 쏠 수 있는 화살을 가졌을 뿐이다. 그래도 화살을 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살 하나씩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아 더 많은 화살의 빗줄기를 만들어내고, 기세 좋게 돌격해 들어오는 저 돈과 기득권과 나으리님들의 병단 머리 위로 퍼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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